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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누정유람기-구례 사성암 (四聖庵)
국내여행 > 상세보기 | 2018-03-31 18:39:25
추천수 21
조회수   642

글쓴이

농팜 친구추가

제목

新 누정유람기-구례 사성암 (四聖庵)
내용

전남 구례군, 자연산소통 지리산과 자연가습기 섬징강, 천혜의 자연혜택을 한꺼번에 받은 복 받은 고을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오를수록 신비감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토리텔링이 무수히 남아 있는 미지의 호기심 어린 마음의 고향같은 고을이기도 하다.

 

그중에 한 곳, 산의 모양이 금자라(金鰲), 또는 바위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겨서 오산(鰲山)이라고 부르게 된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구례와 곡성 등 전경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승지에 자리한 미지의 호기심에 자극하게 하는 사성암(四聖庵)을 찾는다.


우선 조선중기의 문인이요  사헌헌부 집의 등을 지낸 최유지(崔攸之, 1603~1673)가 1651년 구례현감으로 내려와  오산을 유람하고 감회를 나타낸 시로 그 맛을 삼킨다.

강 나루에 비 개이니 /오산(鰲山) 봉우리높은 창공에 꽂혀있네
천고에 계절에 나 최유지 유람을 나오니/즐겁게 놀고 즐기 만 것은 높은 하늘이었네
팔월 보름에 세인(世人)들을 바라보니/멀리 보이는 것이 아마도 신선의 마을인가 싶구나

구례가는 길 남쪽 입구 구례구역을 들어서 300여m를 잔입하면 우측에 독립된 산 둥주리봉 정상 근처에  암자가 보인다. 구례읍에서 약 2km 남쪽인 구례군 문천면 죽마리 산4번지 오산(鰲山)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사찰이 사성암이다. 선석(禪石:참선하는 바위)이 있어 선석암(禪石庵)이라고도 한다.

뿐만아니라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성암 암자를 중심으로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오산이 자랑하는 12비경을 만날 수 있다.

사성암 뒤편엔 뗏목을 팔러 하동으로 내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내를 잃은 설움에 끝내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전설이 깃든 텀바위가 있는 등 일대는 스토리텔링의 아이콘이었다.

때 마침 오후들어 바람이 적당이 불어 행글라이더를 즐기는 모습과 낮에 나온 반달이 암자 주변에 지나고 있는 쉽지 않는 절묘한 장면이 포착된다. 이곳은 이정표를 따라 쉽게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산에 오르는 길 또한 다른 곳과 달라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그것은 가파른 경사길에 차량이 서로 교차하기 힘든 좁은 길로 운행도 무전기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며 왕복해야 하기 때문에 방문객들의 선택의 권한 없고 이곳의 관리자의 치침에 따라야 만 했다.
 

셔틀버스로 20분을 급경사를 거슬러 정상에 오르니 붉은 깎아진 암벽에 콘크리트 기둥으로 바치고  있는 그 위에 작은 규모의 목조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사성암의 대표 전각인 약사전을 만날 수 있었다.

금강산 보덕암을 연상되게 하는  이 암자는 약사전 뒷쪽 얌벽 높이 약 4m되는 음각된 마애여래입상을 모시기 위해 암벽을 감싸는 형태를 지어졌다. 

정자 전면에는  유리광전이라고  편액이 걸려있고 암자 내부 입상을 보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한 돌계단을 따라 올라  법당내부에 바위벽에는 구례 사성암 마애여래입상(求禮四聖庵磨崖如來立像 전남유형문화재 제220호)이라는 명칭의  신라시대의 고승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불가사의한 전설이 전하고 있는 음각으로 총높이 390cm 어깨폭 80cm, 몸넓이폭 174cm 크기에 새겨져 있다. 

 

이 입상을 감싸는 공간을 만들다 보니 암자건물 형태도 층을 이에 마춰 이루어져 있고 공간내부도 변형된 마름모형에 비좁다.

왼손에는 애민중생을 위해 약사발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암자가 건립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암자 근처 암벽에 고려시대 10세기 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선각마애여래입상이 있어 창건 시기는 고려시기로 짐작하고 있다.


 

압도된 분위기는 사성암 뒤 산책로 주변에 기암괴석과 석굴 등 어느 산에 뒤지지 않을 만큼 신비감을 주고 있다. 

급한 돌계단을 오르면 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법당 왼편에 지장전을 시작으로 신선대(神仙臺). 관음대(觀音臺). 좌선대(左禪臺). 우선대(右禪臺). 배석대(拜石臺). 향로대(香爐臺). 쉬열대. 풍월대(風月臺). 괘불대(掛佛臺). 앙천대(仰天臺). 낙조대(落照臺). 영자대(影子臺) 왕천대(王天臺) 오산(鰲山)의 12대(臺)와 산신각, 소원바위, 도선굴, 좌선대, 귀목나무, 풍월대, 망풍대 등 절경의 만물상에  구례를 가로 지르는 섬진강의 제 1지류에 속하는 서시천(徐市川)의 풍경과 함께 대지의 기운 속에 구례의 역사와 삶, 풍류를 낳게 한 현장이 한눈에 파노라처럼 펼쳐졌다.

 

또 나주 출신으로 이곳 오산(蜈山)에 있을 때에는 바위 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경을 익혔고, 오경(五更)만 되면 게송(偈頌)을 읊었는데, 소리가 매우 우렁차 10리 밖까지 들렸으며, 조금도 때를 어기지 않아 듣는 사람들이 그로써 아침이 된 줄을 알았다고 한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大師 慧諶 1178~1234) 연기 조사(緣起祖師), 원효대사(元曉大師), 도선 국사 등 네 명의  성인들이 수도하던 곳이라 해서 사성암 (四聖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사성암사적(四聖庵史蹟)에 기록이 남아 있다. 


또 네명의 선인들이라 일컬어 사선(四仙) 고승들이 수도를 했다하여 '사선암(四仙岩)’이라고도 부른다.   

이곳 암자는 원래 오산암(蜈山庵)이라 불렀는데, 544년(백제 성왕 2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연기조사는 인도 승려로 이곳에 바라보이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를 세웠으며   그 이듬해 사성암을 세웠다.

또 천은사, 연곡사, 천왕봉밑의 범계사, 흥덕의 연기사와 소요사, 나주의 운흥사,  곤양 서봉사, 산청 대원사 등이 도 모두 연기 조사가 창건해 일대의 불교문화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구례 화엄사 연기조사(緣起祖師)의 국보 제 35호인 사사자 삼층석탑에 주인공으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차 공양, 선(禪)차(茶)악(樂)으로 풍류차의 종조가 된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에는 ‘한명(漢茗)’이라는 글자가 우리 차 문화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등 무수한 잡힐 듯한 사연들이 이곳의 흐르는 바람처럼 스쳐간다.

멀리 지리산의 수없는 연봉들이 거침없이 치달리고 파도처럼 일렁이니  청푸른색이 시리도록 눈부시다.



오산(鰲山)에 유람하면서 읊은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오산 아래에서 문산재(文山齋) 서당을 운영했던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장이 뛰어난 진사(進士)였던  취아(醉啞) 고원후(高元厚 1609∼1684)가 섬진강이 흐르는  곡점에 다시 세우고 지내며 호연지기를 다지며 읊을 만 했다.

높고 험한 저 산을 그 누가 동등하게 나란히 할 수 있으랴?/선옹(仙翁)은 예로 부터 인연이 있었네
나와 함께 단풍이 든 숲에서 즐기고 노니 /저녁 무렵의 풍경은 찬란하여 비단결 같고
또한 천공(天公 하늘)이 우리 마을을 /사치스럽게 해주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또 이곳에서 최사노가 지리산을 오르면 읊었던 싯글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방장산(지리산)은 천하에 소문이났지만/이 산위에 오르기는 처음이라네
진시황도 와보지 못한 곳이요/한무제도 이곳에선 놀지 못했더니라

해와 달은 머리 위를 밝게 비추고/골안개 뜬구름은 발뿌리에 도는구나
산마루에는 어느덧 흰 눈이 보이는데/저 아래 들녘은 아직 초가을일세.

자연순리의 법칙을 누구나 초연하게 만드는 사성암 일대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또하나의 좋은 쉼터를 만들어 낸 곳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구름 가나 하늘은 움직이지 않고/배 가도 언덕은 옮겨 가지 않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기쁨과 슬픔은 어느 곳에 이는가

17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17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승려 편양당(鞭羊堂 1581-1664) 언기(彦機)의 초연한 자세를 생각나게 했던 여행이었다.

어느 스님이 그랬다. "오고가는 흰 구름 속에 드디어 평상심을 얻었도다. 去來白雲裏 且得事平常"라고.... 마음을 비워라.

세상의 모든 이치는 마음을 비우면 통한다는 뜻의 궁칙통(窮則通)이란 단어가 생각나게하는 그런 여행이었다.  

"하루라도 마음이 깨끗하고 편안하다면 그 하루는 신선이 되느니라.一日淸閑一日仙 /明心寶鑑 省心篇上"했듯이 적어도 가슴속은 후련했다.

가는길은 대중교통 이용할때는 구례읍 → 문척면 죽연마을까지 군내버스 16회 운행(15분 소요)되고 있으며, 자동차를 이용할때는 구례읍 → 861번 지방도 → 문척교 건너서 우회전 → 죽마리 → 사성암에 이를 수 있다. 연기암(烟起庵)



송광사 제6세인 원감국사문집(圓鑑國師文集)에도 오산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오산 정상에는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 진각 양 국사가 연좌수도(宴坐修道)했던 곳"이라는 등의  기록들로 보아 옛부터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어느날 구례의 인물 매천 황현이 구례 마산면(馬山面) 사도리(沙圖里)에 이곳은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공부했던 곳 지금 상사(上沙) 마을의 남쪽 문척면(文尺面) 죽마리(竹麻里)에 있는 사성암(四聖庵)을 가리키며 읊었다.

도선 국사 옛 암자를 멀리 바라본다. 모래사장에 그의 자취 있는가 없는가
이 복지에 자욱이 구름 이내 일어나네
遙望詵師遺菴 沙中圖跡在否 福地蒸作雲嵐

그러나 이곳에서의 분위기로는 어떠한 구도를 위한 곳이라고 해도 믿게 만들고 있다. 특히 도선이 사성암(四聖庵)에서 수행정진 중 지리산 이인에게 음양풍수를 지도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어 신빙성을 주고 있다

고려 고종 때 천태종(天台宗) 승려로 송광사松廣寺)에 가서 혜심화상(慧諶和尙) 배우고  만덕산 백련사에 원묘국사에게 공부한 정명국사(靜明國師) 석천인(釋天因 1205 ~ 1248)은

신선이 놀던 일 멀고 아득하여라 / 아름다운 경개는 갈수록 그윽하다
맑은 시냇물 푸르기 쪽빛 같고 / 돌에 끼인 이끼 자리보다 따뜻해라
仙遊邈已遠 嘉境轉幽寂  晴川碧如藍  石蘚暖於席

이렇게 소요하기 얼마나 가리 / 부앙하는 사이에 묵은 자취되리라
얼마든지 머물러 놀고 싶건만 / 다만 날이 저물까 두려워하노라
逍遙能幾時 俛仰忽陳迹 淹留非不佳 但恐日易夕

이들 사선(四仙)의 이야기를 들어다 보면 의상대사(義湘大師)는 화엄일승법계도에서 "하나가 곧 일체(一切)이며,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十方)이 있는 것이요, 한 찰나가 곧 영원이라고 한다. 양에 있어서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있지만 그것은 실은 하나이며, 공간은 시방(十方)으로 너르게 되어 있지만 그것이 한 작은 티끌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시간에 있어서 영원한 것도 한 찰나이다"라고 주창했다.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소성거사(少性居士)라 자호(自號)하였으며, 의상과 함께 해로를 통하여 입당(入唐)하기 위하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의상과 헤어져서 돌아왔던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라는 무애가(無碍歌)를 불렀다.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으로 대 명문장가로 당대를 풍미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그의 나이 32세 때인 1199년(신종2)  전주목 사록(全州牧司錄)으로 보임하여 서기(書記)를 겸임하도록 해 가을 9월에 전주로 부임했는데, 전주를 다스릴 때 통판 낭장(通判郎將)인 어떤 이가 탐하고 방자자 굽히지 않는 공사(公事)로 인해 겨울 12월에 파직을 당해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가  원효대사를 두고 읊기를...

털을 깎아, 맨 머리면 원효대사요 / 털이 있어 관을 쓰면 소성거사로세
비록 몸이 천이나 백으로 나타난대도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으이
이 두 가지의 형은 / 다만 한 마당의 유희겠지
剃而髠則元曉大師 髮而巾則少性居士 如指掌耳 此兩段作形 但一場戱/동문선 제50권

여기서 진각국사(眞覺大師)는 지눌(知訥)의 제자로 이들이 만나는 일화에는 1205년(희종 1) 가을, 지눌이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때 선객 몇 사람과 함께 찾아가다가 그 산 밑에서 쉬다 1, 000여 걸음 밖에 있는 암자에서 지눌이 그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아이 부르는 소리는 송라의 안개에 떨어지는데,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의 바람에 풍겨오네(呼兒響落松蘿霧 煮茗香傳石徑風)."라는 게송을 지었다.

지눌을 만나 이 게송을 보였더니 지눌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중의 부채를 주었다. 혜심은 또 게송을 짓기를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더니 지금은 제자의 손안에 있네. 만일 더위에 허덕이며 다닐 때면 맑은 바람 일으킨들 그 어떠하리(昔在師翁手裏 今在弟子掌中 若遇熱忙狂走 不妨打起淸風)." 지눌은 그 재능을 더욱 중히 여겼다 한다.

그러한 진각국사의 '덜함도 없고 더함도 없다(無減亦無添)'라는 시를 음미해 보면....

"어린이 한 살 더하고  늙은이는 한 살 감했으면 하나,  늙은이 어린이할 것 없이  덜함도 없고 더함도 없다. 少者添一歲 老者減一年  非干老少者 無減亦無添"

둥주리봉 정상을 가는 길에는 귀목나무(수령 800년),  소원바위와  극락전, 산신각, 도선굴, 소원바위, 좌선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오산은 해발 530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경승지였다. 그래서 오늘도 외국인들을 포함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귀목나무(수령 800년)와 7개의 바위가 원을 그리면서 놓여 있는 곳이 있으며, 더 오르면 작은 석불상 오른쪽에는 소원바위의 전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청동 조각상이 있다.



너희들야 죽고나면 이름조차 삭지만  강물은 끊임없어 만고에 흐른다네.
爾曹身與名俱滅  不廢江河萬古流 / 杜詩諺解


굴 안쪽 벽에는 사연과 이름을 등의 낙서들이 그득하다. 조선후기 문인이요 의학자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부하고 처사적 삶을 살았던 운계(雲溪) 황신구(黃信龜 1633 인조 11~1685 숙종 11)도 오산에도 오르고 암벽에 시를 읊어 각인하고 떠났다.

영오(靈鰲)의 천년 노후에 가루된 뼈를 모여서 /우뚝 운소(雲宵)에 솟아 한덩이 산이 되었네
홀로 가을 안개 해치고 멀리 바라보니/천풍(天風)이 나에게 불어와 신선이 있는 곳으로 보내려하네
靈鰲霜骨老千年 矗出雲霄杳一拳 獨拂秋霞開遠望 天風吹我欲登仙 /題鰲山石 

이 일대도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로 힐링(Healing)을 위한 행위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곳을 힐링여행의 한 곳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이곳에 올 때에는 원효대사 금언(金言) 정도는 암송하고 오면 더 실감나는 답사가 될 듯 하다. 원효대사의 1000여전에 후인에 대한 충고가 지금도 감동을 주고 남음이 있다.

재물과 여색을 보거든, 반드시 정념(正念)으로 대하라. 삼일동안 마음을 닦아도 천년의 보배요, 백년동안 모은 재물도 하루아침의 티끌이니라.

이 몸을 해치는 것은 여색(女色)보다 더 한 것이 없고, 도(道)를 상(喪)하게 하는 근본은 재화(財貨)-재물 보다 더 한 것이 없다.여색을 보거든 호랑이와 뱀을 본 것 같이 하고, 금과 옥을 대하거든 목석을 본듯이 여겨야 하느니라.

중승속(衆僧俗) 가운데 거(居)하되, 언제나 마음을 평등히 가질지어다. 응당히 머무는 바(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 ......

여행은 그래서 갔다 왔다는 이력이 아니라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남는 것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태초의 빛과 구름, 흙과 바람이 강물처럼 흐른 곳, 머문는 동안 다른 생각없이 이곳의 자연물과 동행하다 보니 분명 몸과 마음을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산바람 속에  지리산과 섬진강을 품은 소박한 풍경.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눈과 마음이 호강하고 있었다. 구례현감 홍이호(洪彝浩)도 어느날 어느 때  잠시 오산(鰲山)에 유람하면서 읊은 시로 대신하다.

높고 험한 저 산을 그 누가 동등하게 나란히 할 수 있으랴?
선옹(仙翁)은 예로 부터 인연이 있었네

나와 함께 단풍이 든 숲에서 즐기고 노니 저녁 무렵의 풍경은 찬란하여 비단결 같고
또한 천공(天公 하늘)이 우리 마을을 사치스럽게 해주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사성암(四聖庵)은 조선시대 기록 중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872년 지방도인 구례현지도(求禮縣地圖)에는 ‘연기암(烟氣庵)’ 또는 ‘연기암(烟起庵)’으로 표기되어 있다.



19세기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봉성읍지(鳳城邑誌)와 호남읍지(湖南邑誌)에 기록된 ‘煙起庵’ 또는 ‘烟起庵’은 위치 설명과 그림의 형태를 보아 사성암(四聖庵)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사성암 일대에서는 작은 암자로 고승들이 암자를 짓고 일대 석굴 등지에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광해군(光海君)의 폭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고 삼사(三司)의 요직을 지내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왕(王)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했으며 예조참의 한성부좌윤(漢城府佐尹)이 되고 증 이조판서에 오른  성만 최 연(崔葕, 1576~1651)이 일대 암자에 오르고 시를 읊기를

높고 먼 오산 봉우리 십이 층 대(臺)에 오르니/시원한 가을이 이미 다하여 객은 돌아오도다
푸른 소나무 잎은 지지 않고 흰 구름 냉랭한데/스님은 석당(石堂)에 누워 대문만 반쯤열고 있네

원래 오산암이라고 불렀으나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 "일심 · 화쟁 · 무애" 사상으로 신라시대에 불교의 대중화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신라말의 승려로 풍수설의 대사로도 통하는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 신라시대진평왕때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이다.

한국매일/문화.오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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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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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굿 샷....포즈가 멋져용.....
by. 125.136.. | 193일 2시간 18분 57초전
[멀티.] 넘 조음, 너무 잘 봤어요,...
by. 관리자.. | 203일 22분 19초전
[멀티.] 참 소복 입은 새악시 같은...
by. 118.222.. | 213일 12시간 20분 36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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